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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포터 더 콥.
그들은 정말 열정적, 아니 광적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지난 새벽 치뤄진 리버풀 대 첼시 경기에서도 토레스의 맹활약과 더불어
더 콥의 응원은 대단했습니다.

1892년 창단된 리버풀은 1906년 역대 두번째 리그우승을 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Walton Breck Road에 자리잡은 골대 뒤에 새로운 관중석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관중석이 완성될 무렵 한 기자가 이를 보고 이름을 'Spion Kop'이라고 부른 것이 그 이름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는 보어전쟁 당시 같은 이름의 언덕에서 전사한 많은 리버풀 출신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리버풀 서포터들은 그 관중석에서 정말 '무서운' 응원으로 세계에 알려집니다.


1985년 5월 29일 브뤼셀(Brussels)의 헤이젤 경기장(Heysel Stadium).
 
리버풀은 유러피언 컵 결승을 유벤투스와 벌이고 있었고,
리버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중 하나로 기록되어야 할뻔한 이날 밤은
가장 끔찍한 밤으로 변해버립니다.

브뤼셀에서 5번째 유러피언 컵을 들기를 바랬던 리버풀 서포터들은 그 대신에
38명의 이탈리아인과 1명의 벨기에인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경기 시작 약 한 시간 전, 경기장의 열기는 절정에 막 치다르려하고 있었습니다.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팬들은 철망 분리 팬스 사이로 서로에게 으르렁댔습니다.
유벤투스 팬들은 리버풀 쪽으로 무엇인가를 계속 던졌고
이에 몇몇 리버풀 팬들은 자신들이 있는 쪽의 이탈리아 인들에게 돌진합니다.

그리고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벤투스 팬들은 달아나기 시작했고 뒤이어 붕괴가 시작됐습니다.
그들을 막고 있던 벽이 위에서부터 붕괴되어 결국 39명의 서포터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리버풀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Kenny Dalglish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팬들이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호텔을 나왔을때 우리의 버스를 좌우에서 계속 쳤습니다. 우리가 Brussels를 떠날때, 이탈리아 인들은 몹시 분노해있었습니다. 그들을 이해합니다. 그들은 39명의 친구를 잃었으니깐요. 저는 그 중 한 이탈리아인을 기억합니다. 그는 제가 앉은 창문에 그의 얼굴을 대고 울며 소리쳤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그 상황에서 잃은 기분을 알아? 경기를 보러 따라왔다가 누군가를 잃은 기분을, 축구가 중요한게 아니야, 어떤 경기도 그 참사에서 잃은 목숨의 가치와 같을 순 없어, 모든것의 의미는 퇴색되었다구'."

경기는 유벤투스의 1-0  승리였지만 유벤투스 팬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리버풀은 유럽 주요 대회에 7년간, 잉글랜드 팀들은 5년간 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 이 끔찍한 참사의 20년 후 챔스 4강에서 두 팀은 비기게 됩니다.

경기가 비긴 후 ‘두 클럽과 서포터간에는 우정이 존재한다.’
라고 리버풀 단장 릭 페리(Rick Parry)는 언급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갖은 경기에서 양팀은 비겼고, 헤이젤 스타디움의 참사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럽게 토리노와 머지사이드 사람들 마음속에 투영되었습니다. 두 클럽은 헤이젤 참사 이후 마음의 가교를 만들었고 강한 유대관계를 쌓아갔죠. 우리 사이의 결속은 강해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39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에 대해 매우 죄송하다는 것을 모든 유벤투스 팬들이 알아주길 원합니다. 우리는 헤이젤 참사 후에 우정의 정신으로 다가갔고,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


리버풀 축구 클럽은 헤이젤 참사로 1985/86 시즌을 많은 제약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안필드는 큰 곤욕을 치렀지만 선수 겸 감독이었던
Kenny Dlaglish 지도아래 리버풀은 리그 챔피언으로 군림하던
에버튼을 누르고 16번째 챔피언쉽 왕관을 차지합니다.

5월 3일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타이틀을 안겨준 King Kenny가 골을 넣음으로써
리버풀은 첫 번째 리그와 다음 주에 Wembley에서 있을 FA 컵 결승을 통한
더블크라운을 눈앞에 두게 되었고 리버풀 축구 클럽은 결국 수년간의 도전 끝에
마침내 그렇게 갈망하던 리그와 FA 컵 동반우승이라는 기쁨을 안았습니다.

기쁨도 잠시, 약 3년 반이 지난 1989년 4월 15일,
25,000명 이상의 리버풀 서포터들은 Nottingham Forest와의
FA컵 준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힐스브로'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96명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양팀에게 햇살이 비추고 환상적인 날로 기록될 수 있던 순간이
잉글랜드 축구에는 다신 없을 끔찍한 재앙의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96명의 리버풀 서포터들은 킥오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Leppings Lane에서 압사되어 죽었습니다.

잉글랜드 축구계와 리버풀에 있어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었습니다.

눈물과 스카프와 꽃과 장례행렬이 이어졌고,
클럽과 서포터들 사이에는 믿기지 않는 결속력이 생기게됩니다.
4월 15일 힐스브로 참사는 다른 어떤 날보다 Kop을 동요시켰지만,
서포터들과, 선수들, 클럽은 서로 위안이 되고,
경기후 왜 Kop이 리버풀FC를 서포트 해야 하는가를 재조명하게 됩니다.

그 후 그들은 경기마다 경기장을 떠나 보낼듯한 응원을 하게되고
경기내내 기립상태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전의 어느 서포터들도 단합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른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경기장에서 리버풀 출신의 비틀즈의 'She loves you', Freddie & The Dreamers의 'I like it', Cilla Black의 'Anyone who had a heart' 같은 노래를 부르며 선수들을 응원했는데 드디어 1963년 그들의 주제가라 할 수 있는 'You'll never walk alone'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Gerry & The Pacemakers가 동년에 발표한 노래였는데 서포터의 정신을 노래하는 듯한 가사때문에 곧바로 The Kop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더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집니다.

리버풀은 서포터들의 지원으로 홈 구장에서 막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BBC는 '리버풀은 서포터들 덕에 홈 경기에서 1점을 안고 시작한다'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리버풀은 리그 우승 18회의 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Anfield의 정문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있다고 하네요.


- You 'll never walk alone -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Hold your head up high,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At the end of a storm,

There's a golden sky,

And the sweet silver song of a lark,

Walk on through the wind,

Walk on through the rain,

Though your dreams be tossed and blown...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And you'll never walk alone....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And you'll never walk alone....

You'll never walk alone.

참고 - 몽테크리토 섬을 찾아서 , 한국 리버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