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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패총이란 조개무지, 조개 무덤이라고도 하며 옛날 사람들이 바다나 강에서 조개 등을 쉽게 구해서 먹고 그 버린 껍질이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유적이다. 패총이 중요한 이유는 패총에는 그 당시 먹었던 조개의 껍데기, 동물이나 물고기의 뼈 등이 있을 뿐 아니라 토기, 석기, 골각기 등 쓰다 버린 생활도구도 발견되며 무덤, 집터, 불 피운 자리 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패총이란 곳은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오늘날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그래서 패총은 석기시대에서 중요한 유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동삼동 패총전시관을 먼저 가보았는데 동삼동 패총전시관은 영도에 있는 것으로 해양대학교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아가기가 동래패총보단 순조로웠다.


 우선 남포동에 도착한 뒤 해양대로 가는 버스를 찾아서 동삼동 패총전시관에 도착하였다. 동삼동 패총은 확실히 조개더미가 있던 곳이라 그런지 온통주변이 바다였다. 박물관은 생각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그리고 패총이 보관되어 있는 곳 중에선 가장 시설이 잘되어있던 곳이라고 생각된다. 동삼동 패총전시관은 신석기시대를 기본적으로 알려주는 곳과 패총을 이해할 수 있게 해놓은 곳, 동삼동패총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으로 구성되어서 신석기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우선 동삼패총전시관에 딱 들어가면 패총 발견 당시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당시 패총 발굴당시 현장은 5문화층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1문화층은 8천~6천5백년도(BC 6000~4500) 로 추정하며 층위는 7~9층이며 이곳에는 독무덤과 덧띠무늬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2문화층은 나와 있지 않았고 3문화층은 5천5백~4천5백년도로 추정하며 층위는 5층으로 이 문화층은 집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은 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4문화층은 4천 5백~4천(BC 2500~2000)년도로 추정하며 층위는 퇴화그은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1~4문화층의 층위는 모두 혼토패층이다. 마지막으로 5문화층은 4천~3천(BC 2000~1500)년도로 추정되며 층위는 2층으로 순패각층이며 겹아가리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만큼 동삼동패총은 다양한 시기의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그만큼 석기시대유적으로써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동삼동패총에는 전시되어있는 것이 상당히 많았는데 우선 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기법에 따라 덧무늬토기, 눌러찍은무늬토기, 겹아가리 토기등 많은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동삼동패총에는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또 토기를 비롯하여 또 많은 생활도구, 어로도구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돌도끼, 갈돌·갈판, 뼈바늘, 작살, 돌 작살, 뼈작살 그물추등 많은 생활·어로도구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동삼동패총은 패총이라는 바다를 중심으로 한 유적인 만큼 어로도구의 비중이 높았다. 그리고 이 당시에 유적을 보면 동물뼈(멧돼지·사슴·노루·오소리·참돔·다랑어·상어뼈 등)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동물 뼈나 조개껍질을 다른 곳과 교류하여 흑요석 같은 재료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런 흑요석으로 생활도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동삼동패총엔 장신구이나 신앙과 의례용품들도 많이 발굴되었다. 장신구로는 흙이나 조개·동물의 뼈·고기 뼈·돌 가공 등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토제 귀걸이, 조개팔찌, 목걸이 등이 이러하다. 이러한 장신구가 중요한 이유는 신석기시대의 장신구는 종교적·주술적 기원과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주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관습을 물론 다른 지역과의 교류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삼동패총에서 발견된 목걸이는 장식보단 신앙과 의례용품으로는 조개가면, 곰모양 토우 등이 있다. 이 곰모양 토우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곰모양 토우를 보면 이 당시 다른 동물모양이 아닌 곰모양을 한 것을 보면 신석기 시대 동삼동패총사람들은 곰신앙을 믿었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곰모양 토우는 비실용적이고 비실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신앙적인 개념으로 곰모양 토우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개가면도 착용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의식적인 용품이라고 추측된다.


 동삼동패총전시관을 한 바퀴 돌면 동삼동패총사람들의 대외 교류한 흔적을 소개해놓았다. 이 당시 한반도의 동삼동패총사람들은 일본 큐슈지역 사람들과 동남해안 지역과 큐슈지역 그 사이의 바다를 같이 이용하면서 쓰시마 섬을 징검다리로 삼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교류의 증거로는 죠몽토기와 흑요석이다. 흑요석이 증거인 이유는 성분분석 결과 일본 북부큐슈산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죠몽토기와 흑요석과 교류되었던 것으로는 동삼동패총사람들의 빗살무늬토기와 장신구, 조개팔찌가 있다.


 마지막으로 동삼동패총엔 무덤도 발견되었다. 근데 이 무덤들이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신석기시대의 움무덤은 발견되지 않고 독무덤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움무덤이란 시신을 묻은 후 흙을 바로 덮은 것이고 독무덤이란 어린아이가 죽었을 경우에 항아리에 시신을 넣는 무덤방식이다. 동삼동패총의 독무덤이 가치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독무덤 중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독무덤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무덤과 매장풍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동삼동패총전시관을 가서 가장 인상 깊던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신석기시대 당시에도 신앙과 의례라는 것이 존재했구나라는 것이었다. 이 걸보면서 그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사람들이 어딘가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강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조개가면을 보니까 당시에도 사람들끼리 즐길 수 있는 축제라는 개념의 문화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두 번째로는 당시에 어린아이를 위한 독무덤이 있단 것도 놀라운 점이였다. 그 이유는 난 과거 석기시대땐 어린이는 채집을 잘 할 수도 없고 생활에서 큰 도움을 줄수없을기 때문에 등한시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시엔 독무덤을 해줄 만큼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해줬던 것 같다.


 세 번째로는 동삼동패총전시관의 환경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박물관을 가보았지만 주변이 온통 바다인 박물관은 처음이었다. 확실히 패총전시관이라 그런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신선한 충격이었고 굉장히 분위기 있는 박물관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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